과일상을 하는 우리 집. 오늘따라 아르바이트하는 윤군이 아파서 나오지 못했다며 얼른 나오라는 엄마의 호출에 할 수 없이 투덜거리며 전철에 올랐다.
‘모처럼만의 공휴일을 과일들에게 바치는구나, 그 친구는 아픈 시간도 잘 맞추네….’ 잠이 덜 깬 상태인지라, ‘자리에 앉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지하철 안은 유난히 붐볐다. 지하철 출퇴근 4년 경력답게 빨리 내릴 것 같은 교복 입은 여학생 앞에 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일곱 정거장이 지나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였다. 다행이 여학생 옆자리가 비어 내가 앉게 되었다. ‘휴우 ~’ 하고 긴 숨을 쉬는데, 출입문이 열리며 머리가 백발이신 칠십이 훨씬 넘어보이는 노인이 들어서시는 거였다.
넘어질 듯한 걸음. 굽은 허리,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제발, 제발, 내 앞에만은…경로석으로, 경로석으로….’ 내 마음의 기도가 무색하게, 할머니는 내 앞에 서셨다. 평소 같으면 벌떡 일어났겠지만, 그날만은 ‘자는 체 할걸’ 하는 후회만 들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서 계시게 하면 마음이 편할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아이구, 고마워 어째쓰까나.’ 하시며 자리에 앉으셨다. 지하철 안은 더욱 붐벼 움직일 틈도 없어졌다.
나는 서서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들으며 짜증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얌전히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는 거였다.
‘드디어 내리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앉을 준비를 하는데, 할머니는 큰 가방은 의자에 올려놓은 채 작은 손지갑만 들고 가시는 거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내리기도 힘든 2호선 환승역 즈음이었다.
솔직히 짜증이 나면서도 ‘가방을 놓고 어디에 가시나?’ 궁금했다. 이리 저리 사람들 사이로 작은 체구를 비집고 옮겨가시는 할머니…
“아니, 할머니! 뭐예요!”
“아휴, 조심하세요!”
여기 저기서 불평의 볼멘소리들이 들려 왔고, 난 이어폰까지 빼고 할머니를 지켜봤다. 드디어 보였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이 있으니~.”
전철 안에서 자주 듣던 목소리.
‘아휴, 또 눈먼 사람이야!’ 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할머니의 꼬부라진 등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자신도 휘청거리는 그 할머니. 너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각장애인의 손을 잡고는 다음 칸 문 앞까지 손수 데려다 주시는 거였다. 갑작스런 할머니의 행동에 승객들의 시선은 집중됐다.
그런 시선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문 앞에서 다 낡아 해진 검정 손지갑을 여는 할머니. 그리고는 꼬깃꼬깃해진 천 원을 시각장애인의 바구니에 넣으시는 거였다.
지하철 안은 할머니 때문에 잠시 조용해졌기에, 멀리서도 할머니의 크지 않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심해서 가시구랴, 아이구 깝깝해 어째쓰까나, 어째쓰까나….”
그런 뒤 할머니는 여전히 휘청거리며 자리로 돌아와 앉으셨다.
‘저 검은 썬그라스 뒤에는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을지 누가 알어!’하는 생각으로 바구니를 든 장애인들을 철저히 외면해 왔던 나. 그리고 멋적은 표정을 짓는 대다수의 승객들. 그 가운데서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자신의 힘없는 다리만을 두드리고 계셨다.
